낭설 12

피를 마시는 새 - 시르마크 부인의 말

"아버지는 제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반짝거리기, 흩어지기, 흐르기, 녹기, 줄어들기, 쪼개지기, 납작해지기, 끓기 등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뺀다면, 대충 맞는 말이야." - 사르마크가에서 있었던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 中. "나는 숨이 막힙니다." 움켜쥔 주먹이 위로 떠올랐다. 제이어는 자신의 두 주먹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생물이 범할 수 있는 최후의 퇴폐는 현실로부터 박리되는 것 입니다. 흐림 없는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탐욕스러운 손을 뻗어 현 실을 움켜쥐는 대신 그 어떤 이유를 대어서든 뒤로 한 발짝 물러날 때,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이유를 대어 현실을 외면할 때 생명은 죽음보다 참혹한 타락으로 침몰합니 다. 치천제가 우리와 우리의 수십 대 후..

2024.02.13

눈물을 마시는 새 -천지척사天地擲柶

대지를 윷판 삼아 하늘로 윷가락을 던진다. 네 개의 윷가락은 날고, 까불거리고, 부딪치고, 구른다. 도, 개, 걸, 윷, 모의 다섯 조합 중 하나가 나올 터인데, 그것은 어느 순간에 정해지는가? 물론 하늘로 던져진 순간이다. 그 순간 다섯 조합은 모두 긍정된다. 대지에 떨어졌을 때 나온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다. 그리고 윷놀이는 계속된다.

2024.01.18

금빛 소매의 노래 - 슬픔이 없는 십오초中

추억이여, 내가 너를 어두운 골목길에서 찾아 헤맬 때부터 너는 이미 내 안의 막다른 길 끝에 기대어 그 길 끝을 손바닥 위에 탁탁 쳐서 능숙하게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비애, 비에 젖어 잘 타지 않는 존재 속에 영원히 타고 있는 노래여, 모든 망명에는 보이지 않는 행운이 있다 한 줌의 배곯은 마음으로 악보 사이를 서성이며 나는 자주 기웃거렸다, 추억이여, 너는 언제나 모르는 노래였다 바깥은 접으면 안이 구겨진다 군대가서 절망한 친구는 자살했지만 절망해서 군대 간 친구는 잘 살았다 안을 수십 번 접어도 바깥은 한치도 구겨지지 않는다 봄이면 느리게 바지춤 추켜올리는 나목, 내가 쓰러지기 직전엔 언제나 앉은뱅이 꽃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알았다 꽃이 문드러지며 뱉어내는 꽃물이 꽃말의 형식인 것처럼 눈물이 네 노래..

2023.11.23

피를 마시는 새 - 종장, 인조새의 말

그녀는 불길 같은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라세오날이 축복한다. 너희들은 한없이 서로를 증오하라. 아낌없이 서로에게 죄를 지어라. 대담하게 서로를 죽여라." 뜻밖의 말에 놀란 사람들 가운데서 파라말 아이솔이 헐떡였다. "역겨운……" 이라세오날이 노호했다. "너로써 너를 저주한다! 어디서 역겹다고 말하느냐, 파라말 아이솔!" 파라말은 증오에 찬 눈으로 이라세오날을 바라보았다. 이라세오날이 말했다. "규범보다 무의미한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서 규칙은, 규범은, 윤리는 한계짓는 능력밖에 없다. 반짝거리기나 흐르기, 끓기를 금지하는 도덕이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규칙과 규범과 윤리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안으로 한계짓는..

2023.06.20

칼의 노래 中 밥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으로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끼니들이 시간의 수레바퀴처럼 군량없는 수영을 밟고 지나갔다. 그해 가을에 해남, 강진, 장흥, 보성, 승주, 고흥은 수확기에 ..

2023.05.04

피를 마시는 새 : 증오1

아실은 고통스러운 눈으로 말리와 대장군을 번갈아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아실은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먼 옛날부터 그녀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지멘의 눈이 거기에 있었다. "지멘. 황제를 죽이고 제 증오를 되찾겠다고 했죠." "죽이는 것이 해결책이라면, 그렇게 한다." "제 증오를 되찾을 수 있다면 세상이 망해도 된다는 건가요? 600조 가까운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사랑도 아니고 동정심도 아니고…… 증오를?" 검은 레콘은 먹구름을 등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미래는 죽은 사람이 정해놓았고, 내 과거는 내가 죽일 사람에 의해 되새겨지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아실은 숨소리를 낮추었다. 지멘이 말했다. "기원이 없는 나날이었다. 기원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원할 시간이 없어서. 움직임뿐..

2023.03.08

피를 마시는 새: 장생

바둑용어로 장생은 패의 일종을 말합니다. 자살패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장생이 나타날 경우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영원히 판이 끝나지 않기에 무승부 처리합니다. "모든 승부가 그렇듯이 결국 바둑도 이기기 위해 두는 것입니다. 저는 승리가 최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부에 임하다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승리도, 패배도 이기려고 노력한 후에 얻는 것이 가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한 패배자에게도 승리자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승리나 패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기기 위해 바둑을 둔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비기는 것이 왜 칭송받아야 하는 겁니까? 비기는 것도 이기거나 지는 것과 똑같은 승부..

2023.03.05

눈물을 마시는 새 중에서1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 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 가이너 카쉬냅의 서문. 라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계속 말했다.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성은, 물론 저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최소한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

2023.02.27

칼의 노래 中, 사쿠라 꽃잎 날리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2022.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