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설

피를 마시는 새 - 시르마크 부인의 말

2024. 2. 13. 21:45

 "아버지는 제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반짝거리기, 흩어지기, 흐르기, 녹기, 줄어들기, 쪼개지기, 납작해지기, 끓기  등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뺀다면, 대충 맞는 말이야."

- 사르마크가에서 있었던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 中.


   "나는 숨이 막힙니다."

   

   움켜쥔 주먹이 위로 떠올랐다. 제이어는 자신의 두 주먹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생물이 범할 수 있는 최후의  퇴폐는 현실로부터 박리되는 것

  입니다. 흐림 없는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탐욕스러운 손을 뻗어 현

  실을 움켜쥐는 대신 그  어떤 이유를 대어서든 뒤로  한 발짝 물러날 

  때,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이유를 

  대어 현실을 외면할  때 생명은 죽음보다  참혹한 타락으로 침몰합니

  다. 치천제가 우리와 우리의 수십  대 후손들에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삶입니다. 우리의 후손과  현실 사이에 언제나 이라세오날

  이라는 질기고 불투명한 막이 끼여들 테니까요."

   

   제이어는 두 주먹을 그대로 앞으로 뻗어 사람들을 겨냥했다.

   

   "결코, 결코 그런 일을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찔러죽

  이다 멸망한다면 그러라지요! 자기를 통제할  줄 모르고 현실을 통제

  할 줄 몰라서 멸종한  생물의 무덤에 나는 어떤  조의도 바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생물이건  현실에 접촉할 기회마저 박탈

  당한다면 나는 그것을 반드시 구출할  겁니다. 하물며 그것이 우리의 

  후손이라면 그들을 구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

  의 후손들을 위해 라세를 죽여야 합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다음 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거

  라고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말도 불편한 것이  되는 시점이 있는데 

  제이어의 말이 끝난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제이

  어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반짝거려보세요. 제이어."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제이어와 

  다른 이들의 시선이 합류된 곳에서는 아실이 조그마한 바위처럼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지멘이 망치 자루에 두 손을 얹은 채 역시 아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목 속에서 아실이 일어섰다. 아실은 양쪽  팔꿈치를 붙잡은 채 제

  이어를 바라보았다.

   

   "흩어져보세요. 흘러보세요. 녹아보세요. 줄어들어보세요. 쪼개져보

  세요. 납작해져보세요. 끓어보세요."

   

   정우가 입을 움찔거렸다. '우슬라 사르마크'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제이어는  눈빛으로 상대를 화형시킬 

  듯이 아실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실?"

   

   "짐작한다면 말씀해보세요. 제이어."

   

   "아무래도 너는 현실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모양이군."

   

   아실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계속 말하라는 표정만 지었다. 제이어는 

  집게손가락으로 아실을 가리켰다.

   

   "하지만 사르마크 부인은 현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뜻으로 그런 말

  을 한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린 손자에게 모든 개체는 가능과 불가능의 종합이며 무엇인가

  를 할 수 없다는 것,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

  소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거지. 뭐든 다 할 수 있다

  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제한성이나 불가능성은 가능성 만큼이나 

  중요한 개별성의 요소야."

   

   "고마워요. 제이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시는군요."

   

   제이어의 사나운 눈초리  때문에 지멘은 아실을  보호하려는 동작을 

  취했다. 그는 깃털을 조금 부풀리고 부리를 조금 들어올렸다. 단순하

  고 작은 동작이지만 그 동작을 끝내자 지멘의 모습은 훨씬 위압감 있

  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멘과  아실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개체는 가능과 불가능의 종합이에요. 무엇인

  가를 해내는 것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는 없어요."

   

   제이어를 바라보는 아실의  하나뿐인 눈은 진한  동정심으로 가득했

  다.

   

   "바꿔 말한다면, 뭔가를 부정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도 없

  어요."

   

   아실은 앞으로 걸어갈 듯 몸을  움직였지만 그녀가 선택한 최종방향

  은 지멘이었다. 아실은 지멘의 다리에  몸을 붙이며 중얼거리듯 말했

  다.

   

   "자신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먹기를 중단한  슬픈 짐승은 굶어죽고 

  말겠지요."

   

   제이어가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정이라니?"

   

   "당신은 이라세오날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잖아요. 왜 그러는지

  도 모르면서."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뭐였는데? 

  귀를 막고 있었나? 왜 그녀를 제거해야 하는지 설명했잖아!"

   

   "미안하지만 지적해야겠군요."

   

   아실은 눈을 내리깔았다.

   

   "화려한 말, 감정을 자극하는 말들은  많았어요. 그건 인정해요. 하

  지만 내용은 없었어요. 죽은 기사들을  조문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지

  만 그런 척하기 위해 입는 당신의  그 하얀 옷과 마찬가지에요. 제이

  어. 당신은 황제의 계획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