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으로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끼니들이 시간의 수레바퀴처럼 군량없는 수영을 밟고 지나갔다. 그해 가을에 해남, 강진, 장흥, 보성, 승주, 고흥은 수확기에 백성들이 흩어져 추수하지 못했다. 가을비가 오래 내려 물에 잠긴 논이 썩었고 멸구가 끓었다. 사람 없는 마을마다 새떼들이 창궐해서 노을 속을 날았다... (중략)
겨울에 이질이 돌았다. 주려서 검불처럼 마른 수졸 6백여 명이 선실 안에 쓰러져 흰 물똥을 싸댔다. 똥물이 갑판 위까지 흘러나왔다. 똥과 사람이 뒤범벅이 되어 고열에 신음하며 뒤채었다. 먹은 것이 없어도 똥물은 한정 없이 쏟아져나왔다. 낮에는 배에서 나와 양지쪽 바위 위에서 똥물에 젖은 몸을 말렸고 해가 저물면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똥물은 점점 묽어져갔고 맑은 똥물을 싸내면 곧 죽었다... (중략)
움막을 불태우고, 타다 남은 시체를 구덩이에 묻었다. 살아남은 수졸들이 허기진 팔다리를 움직여 삽질을 했다. 삽질하는 수졸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삽질을 하던 수졸들이 며칠 뒤 이질에 걸려 같은 자리에 묻혔다. 산 자들이 죽은 자의 구덩이를 팠고, 죽어서 거기에 묻혔다...(중략)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고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 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 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 나는 흔히 내 숙사 방 안에서 안위, 송여종, 김수철 들과 겸상으로 밥을 먹었다. 부엌을 맡은 종이 보리밥에 짠지, 된장국을 내왔다. 우리는 거의 말없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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