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설

칼의 노래 中, 사쿠라 꽃잎 날리네

2022. 7. 22. 01:06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삶을 버린자가 죽음을 가로지를 수 없을 것이었는데, 바다에서 그 경계는 늘 불분명했고 경계의 불분명함은 늘 확실했다. 길고 가파른 전투가 끝나는 저녁 바다는 죽고 부서져서 물에 뜬 것들의 쓰레기로 덮였고 화약 연기에 노을이 스몄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늘 살아 있었고, 살아서 기진맥진했다.


적의 칼은 삼엄했다. 칼자루 쪽에 눈을 대고 칼날의 끝쪽을 들여다보았다. 칼이 끝나는 곳에 한 개의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쇠의 극한이었다. 칼은 그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듯했다. 칼날 위에서 쇠는 맹렬한 기세로 소멸하고 있었다...(중략) 칼날에 묻은 피를 모아 흘려보냈던 피고랑 속에서 빛이 들끓고 있었다.

칼날에서 칼등 쪽으로, 숫돌에 갈리운 칼은 쇠의 푸른 속살을 드러냈고, 쇠의 속살 위에서 빛은 구름 무늬로 어른거렸다. 쇠의 속살은 피부로 싸이지 않은 고기의 속살처럼 보였다. 언젠가 임금이 몸보신하라고 보내준 쇠고기의 단면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그 쇠고기의 단면에 목숨의 안쪽을 이루던 난해한 무늬들이 드러나 있었다. 쇠의 안쪽에도 저러한 무늬가 있었구나, 언젠가 내가 적의 칼을 받게 되면 저러한 쇠의 무늬가 내 목숨의 무늬를 건너가겠구나, 적의 칼의 쇠비린내에 내 피의 비린내가 묻어나겠구나, 나는 죽은 적의 칼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칼이 뿜어내는 적의의 근원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적의 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선명하게 드러난 운명이었다. 적의 칼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칼날의 아래쪽에 글자가 몇 자 새겨져 있었다. 죽은 적 척후장의 검명劍名인 모양이었다. 나는 칼을 눈앞으로 바싹 당겨 글자를 들여다 보았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나는 안위에게 죽은 적의 검명을 보여주었다. 안위가 말했다.
-글귀가 심히 가엾어서 요사스럽습니다.
-죽은 척후장은 몇 살이라 하더냐?
-스물 여섯이라 하더이다.
-내력을 물었느냐?
-소상히는 모르오나, 세습 무사의 자식이라 하더이다.
-저 글귀가 가여우냐?
-적이지만 준수했습니다. 내 부하였더라면 싶었습니다.
-글이 칼을 닮았으니 필시 사나운 놈이었을 게다.

안위가 빼앗은 적의 칼은 10자루였다. 나는 또 다른 칼을 뺴보았다. 오래 쓴 칼이었다. 피고랑에 녹이 슬어 있었다. 그 칼에도 검명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녹슨 글자들을 꼼꼼히 들여다 보았다.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이 칼을 쓰던 자를 죽였느냐?
-배를 나포할 때 스무 명을 사살했습니다. 그 때 죽은 자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모두 다 젊은 녀석이었습니다.
-이 또한 모진 놈이었을 게다.

적의 칼을 한자루씩 들여다보면서, 나는 하루 종일 배를 저어온 안위를 데리고 그런 하나마나한 잡소리를 하고 있었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젊은 것들의 글이었다. 바다에서 내가 죽인 무수한 적들의 백골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칼에 새겨넣은 물들일 염染자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젊은 적들은 찌르고 베는 시심의 문장가들이었다. 내 젊은 적들의 문장은 칼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적들 수만 명이 경상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내가 죽인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이 날려도 나는 이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 때, 두 선왕릉의 일을 전하는 선전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웅포에서 돌아온 저녁이었다. 그날 적들은 포구 깊숙이 정박해서 넓은 바다로 나오지 않았고 유인에도 걸리지 않았다... 그날 적의 종심을 찌르지 못했다.

여수 좌수영 숙사에서 선전관들에게 술을 먹이며 왕릉의 일들을 들었다. 그때 나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여웠고, 또 무서웠다. 나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무서웠다. 계사년에 왕릉을 범한 자들을 포로들 중에서 색출해 내라는 유지는 그 허망과 무내용을 완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붓을 들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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